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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탐험대] 선교회고록 13장 황무지에서의 개척

by 공공기관정보 2020. 8. 22.

해방과 남북 분단 이후 남한 땅에서 시베리아를 찾은 첫 선교의 걸음이 필자의 시베리아 답사와 이주의 행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북방민족의 터전이었던 시베리아로 첫 선교의 발걸음이 닿았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1991년 2월부터의 사할린에서의 첫 사역을 뒤로 하고, 그 해 5월 초부터 약 2주에 걸쳐 소련 전역을 정탐하는 답사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어 6월 초의 두 번째의 답사 후에 6월 말에 우선 필자가 시베리아로 건너와 가족의 이전 및 사역을 위한 장소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황무지에서의 개척을 향한 준비는 숨가쁘게 진행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고려인협회에서 활동하던 사할린 출신의 2세 분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는 사할린 출신이라 하여도 이미 오랫동안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아 한국어를 다시 배워야하는 형편이었고, 성경과 기독교신앙에는 완전 문외한이었으니 전혀 성경과 신앙의 언어로의 한국어 의사소통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노어로의 완전한 문장구성과 단어구사 등 고차원의 사역을 위한 언어훈련이 되었습니다.
주말이 되어서야 그 소식을 듣게 된 형편에 노어수업을 해주시던 교수님께 부랴부랴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조력자도 없어 어떻게 예배준비를 마치고 나니 예배와 설교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2년 가까이 하니 수요일 등의 짧은 설교는 원고 없이도 하게 되었고, 3년 정도가 지나서는 자유롭게 노어로 설교하게끔 되었습니다.
이제 노어로 설교를 시작하고, 여름에 휴가와 농사 차 나갔던 사람들이 도시의 집으로 돌아오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시작된 구상이 도시에 있는 모든 가정,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복음의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전도사역으로 찾은 것이 전도지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복음에 더 구체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주일에 전했던 요한복음 3장의 2회에 걸친 복음전도설교를 하나의 소책자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성인 대상의 전도지는 전달 가능한 아파트 단지의 우편함에 각 가정을 대상으로 넣는 것을 기본으로 개인주택에 사는 주민들을 배려해 지하철의 주요 역에서도 동시에 나누기로 했습니다.


벌써 11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신앙이 주일신앙에도 미치지 못하는 명절신앙이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하게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로 발걸음을 인도하신 주님의 뜻이 러시아의 사회와 교회를 이끌어갈 성경적인 토대에 굳건하게 세워진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는 분명함에 이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제자훈련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교회의 제자훈련 교재를 가지고 진행되었던 사역은 한국에서의 결과와 동일한 유사제자들만을 남기는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룹과 교회, 사역을 세우기 위한 진행은 그 열매로 주님의 사람을 세울 수 없는 것이 명확합니다.
말씀이 신자들과 교회의 든든한 영적 토대가 되도록 시행하였던 성경강해의 말씀증거 사역과 동시에 그 말씀을 개인의 신앙과 삶, 교회와 사회에 깨닫고 적용하기 위한 시도가 진행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사역을 미국에서 시작된 고 척 스미스 목사의 갈보리 채플 운동에서 접하기도 하나 말씀의 실제적인 적용에 대한 사역은 느슨한 감이 있습니다.
말씀과 신앙을 대하는 러시아 문화의 근저에는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둔 이원론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 개척과 사역 초기의 아직 교인들이 신앙의 토대에 세워지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해와 적용을 위한 질문과 나눔은 의례 공산당식 토론과 비판을 넘어 인민재판의 현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온 교인 대상의 말씀 훈련 외에 몇몇의 준비된 이들과 따로 모여 그룹으로 양육하며 제자로 세우는 일을 수 차례 반복하여 진행하며, 동시에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섬기도록 했습니다.
주일학교 그룹, 청년 그룹, 가정교회 그룹, 새신자 그룹 등을 만들어 제자들이 감당토록 했습니다.
이를 위해 사역의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것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 삶의 전 영역 가운데서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조한 것이 가정모임과 가정교회, 직장에서의 신앙의 적용과 직업을 통한 사명의 실천 등이었습니다.
예배와 사역을 위한 공간 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이 함께 살며, 일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95년 7월부터 98년 6월까지 주로 3년간에 걸쳐 진행된 건축을 마치고 헤아려 보니 독립된 공간이 건물 내에 33개가 되는 공동체의 삶과 사역을 위한 터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자 됨의 표지는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무가 옮겨 심겨진 후 다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정성을 들인 나무들이 적지 않게 말라죽는 일을 자주 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센터를 마련하고, 첫 안식년을 마치고 시베리아로 귀환한 즉시 99년 10월 시베리아의 겨울 한파가 밀어닥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들을 찾아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제 약과 구제품 옷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과 상담, 양육의 영적 양식을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15년이 흘렀고 필자가 시베리아를 떠난 지 5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교회의 소자를 섬기는 일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리에서의 사역을 시작하고 얼마를 지나면서, 중앙아시아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들과 소수민족들을 섬기는 일을 교회의 핵심사역의 하나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섬겨야할 소자들인 이방 이주민들과 소수민족들은 특별한 배려와 구체적인 사역이 없이는 찾아오지도 않을뿐더러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베리아에 산재한 소수민족들의 근거지를 연결하고, 이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진행하면서 교회도 이들과 함께하는 다민족사역으로 그 방향을 세워 진행했습니다.
필자가 못다 한 소자를 섬기는 일을 이 시간에도 제자들과 자녀들이 이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 지상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역의 본질이 있습니다.
전기 했던 대로 더 멀리 하카스지역에는 서울의 교회와 연결하여 사역을 지원하다, 제자를 선교사로 파송해 현지민족을 섬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역이 자리가 잡혀가자 이들을 연결하여 소통하는 공의회, 노회로의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어 선교사로의 사역과 목회실습기간을 거쳐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하여 필자가 지속하여 섬겼던 시베리아의 첫 사역의 터전이요 센터였던 시 중심의 노보시비르스크장로교회를 위임하는 일까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위임자로 세워진 제자 외에 신학의 과정을 거친 이들이 사역자들로 교회를 개척하고, 여러 모양으로 현지교회를 세워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선교의 열매는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식민화의 결과를 서구 선교의 폐해를 통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인으로의 교회는 인종이나 출신지, 학연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지도자로 세웠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사역을 위임하므로 그 선교는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로마제국 전역을 복음과 말씀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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